이야기

사업을 접으면서 벌려놓은 것들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면 겪게되는 많은 일들 중 금전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금전관계라기보다, 정기적으로 비용 결제가 필요한 부분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아물어가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이따금 '이 경험의 비용을 내세요!' 하고 철지난 청구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껏 비유적으로 말했지만, 창업 후 인프라를 정리하는 과정에 AWS 계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루트 계정의 Google Workspace, 도메인 등 다른 모든 제반 서비스는 해지했지만 AWS 계정을 정지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대표 아저씨의 부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한동안 잊고살았는데, 작년 말부터 나의 카드로 해외결제 시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AWS 계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인듯 했다. 처음에는 AWS 계정을 찾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개인 정보를 철저히 여기는 AWS의 정책에 의해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그냥 인생 경험한 비용을 낸다 치고 넘어가려고 했으나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최근 대출 우대금리를 위해 다른 카드를 모두 없애고 대출을 실행한 주거래은행의 카드로 소비를 몰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해외 결제가 일어나던 H 카드도 없앴는데, 그 때부터 무한 해외결제시도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번씩, 아마 두 건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 계정도 카드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무차별 문자 공격에 고스란히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칭을 해보니 이런 경우 새로운 AWS 계정을 만들어 Support 티켓을 열고 문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AI가 만든 디스토피아가 가장 먼저 찾아온 산업

은행이 상담원 인력을 AI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느 은행의 ARS에 전화를 걸어보아도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건 개같은 보이는 ARS, 누르는 ARS 등 완성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병신같은 인트로다. 어떤 옵션을 선택해도 내 문의를 들어줄 사람은 찾을 수 없고 3세 수준으로 말해야 겨우 알아듣는, 수화기 너머 5세 수준(이라고 했지만 우리 아들은 나보다 말을 잘한다)의 누군가에게 한글자씩 또박도박 말해야 하는 것이다.

카드를 해지한 카드사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해지한 카드의 번호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카드사에 문의하기 위해 카드사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이는 ARS로 전환시켰다. 문제는 나의 아이폰에서는 보이는 ARS 페이지가 무한 로딩에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것도 뜨지 않고 혹시 마음이 급해 새로고침하면 4XX를 뱉어버리는 극악의 UX를 자랑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이 무적의 궁극기, 그러니까 문의할 루트 자체를 없애버리는 대담한 전략을 파훼할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이틀, 사흘을 씨름하다 찾은 답은 카드 어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카드 어플의 실시간 상담을 이용하면 AI 상담원이 아닌 상담사와 채팅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실시간 상담 메뉴조차도 열려라 참깨 급의 주문을 외지 않는 한 찾아볼 수 없게 꽁꽁 숨겨놓았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끝에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역시 AI에 시달린 사람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상담원의 채팅에는 피로가 잔뜩 묻어있었다. 더 신박한 부분은 이러한 실시간 채팅은 히스토리가 남지 않아 동일한 문의를 하기 위해서는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다시 피로한 상담사와 채팅을 해야하는 것이었다.

마치며

이렇게 찾아낸 카드 번호와 함께 AWS에 문의를 했을 때, 달리 조치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일정 기간 이상 결제가 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계정이 정지되며 결제가 취소될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다. 다소 맥빠지고 찝찝한 결론이었다. 서포트 티켓 담당자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별 도리 없이 수긍했고 이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10년 뒤에 나에게 다시 청구서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우지 못한채 일주일에 한 번씩 울리는 결제요청 문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나는 AI로 대체가 가장 유망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내 자리가 곧 AI로 대체될 것이라는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언젠가 내가 대체되더라도 대체되길 정말 잘했다 싶을 정도의 AI가, 되도록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