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시간 감상
나는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하나
소년의 시간
우리 부부는 아이와 전자기기의 만남을 차단하고 있다. 집에 TV는 없애버린 지 오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영상통화 하거나 어린이집에 보낼 가족 셀카를 찍는 등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최대한 스마트폰 노출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제까지 먹힐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아이의 관심이 향하지 않는 한 최대한 오래 스마트폰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다. 도무지 장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 백해무익한 것으로부터 아이를 최대한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부모로서 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스마트폰의 힘을 빌린다. 지난주 미용실에서도 아기상어의 힘을, 지난달 여행 갈 때 비행기 안에서도 뽀로로-갓의 힘을 빌렸다.)
21세기 소년의 시간
갑자기 스마트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 정주행한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 때문이다. 시작부터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는 13살 소년과 그 가족, 그리고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이미 워낙 유명한 드라마라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통제 불가능한 자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는 부모-자식 관계, 스마트폰을 통해 부정적인 콘텐츠에 노출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아이의 세계. 내가 내 자녀의 미래를 통제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첫 번째 기억나는 장면은 슬럼화된 학교의 모습, 선생님과 학생의 본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허망하다고 할 만큼 황폐화된 학교의 모습이다. 교사들에게는 권위도, 일말의 사명감도 찾아볼 수 없고 학생들 또한 학교에서 얻어갈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사건 당사자들이 다닌 학교(사건과 관련 없지만 아들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음)를 찾아와 현실을 목도하고 무관심했던, 혹은 어렵기만 했던 자신의 아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는 모습으로 1화가 마무리된다. 나 또한 미래의 우리 학교들이 저런 모습으로 변해갈까 무서웠다.
다음은 스마트폰, 특히 SNS에서 발생하는 괴롭힘과 따돌림, 은어, 십대 문화에 대한 내용이다. 인셀이니, 하트 색깔의 의미니 하는 것들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의 민감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공유, 유포하고 다른 성(性)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계속해서 증폭시켜나간다. 과연 이 살인자를 만들어낸 것은 무엇인가, 했을 때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질 나쁜 정보들 아닐까? 통제 불가능한 정보의 바다 속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아직은 부족한 아이들을 풀어놓고 마음껏 헤엄칠 수 있게 놔두는 것이.. 그렇다고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싶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작은 악마를 키워낸 것에 대한 부부의 대화 또한 인상 깊었다. 그래도 무난하게 자란 딸과 살인자가 된 아들을 키운 양육방식에 도대체 어떤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첫째 누나를 키운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한 명의 아이는 살인자가 되었다. 부모는 그들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다만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에 대한 답은 내놓을 수 없다. 끝까지 살인 혐의를 부인하다 재판을 앞두고 인정하기로 마음먹은 아들의 전화를 받고 무너지는 마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까지 가족의 삶이 달라질지 알 수 없는 막막함과 함께 아들의 침대에 얼굴을 묻은 아버지의 오열로 막을 내린다.
20세기 소년은 어떻게 해야하나
도대체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에 대한 큰 고민을 남긴 작품이다. 아이가 나의 손을 떠날 때 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진다. 돈벌이를 핑계로 아이에게 쏟아야 하는 관심을 줄이면 안된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나의 입맛대로 살게 하는 것은 원하지 않고 가능할 리도 없다. 다만 내가 아이의 옆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고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